top of page
배경1__edited.png
배경1__edited.png
계절.png

  아름답지 않아.

  바위 사이로 듬성듬성 나 있는 하얀 꽃 무리를 보며 툰드라맨은 읊조렸다. 이런 건 아름답지 않아. 듣는 사람은 없었지만 툰드라맨은 누군가 듣기라도 하는 듯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휑하니 부는 춥고 건조한 바람만이 그의 말에 응답했다. 그는 그조차 넌덜머리가 났다.

  툰드라맨은, 그 거대한 몸을 굽혀 바위틈의 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자그마한 꽃망울은 손끝으로 건드리기라도 하면 터질 것 같이 연약해 보인다. 무엇보다 수수하다. 눈에 띄는 색깔도 아니거니와 시선을 빼앗을 만큼 아름답게 피어 있지도 않다. 납작하게 붙어 자라는 모습이 어딘지 초라해 보인다. 그는 손을 뻗어 꽃망울을 건드렸다. 그 손길에 꽃잎은 톡 하고 터져 바람에 실려 날아간다.

 

  그거 알아? 극지의 꽃들은 하나 같이 다 아름다워. 연구소에 있었을 때, 칼린카 아가씨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싶어 의아한 표정으로 아가씨를 바라보자 그녀는 웃었다. 그도 그럴게 그 꽃들은 혹독한 환경에서도 뿌리내려 자라는걸. 아름답지 않을 리 없어. 분명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렇지만……'

 

  금방이라도 손을 대면 바스라지는, 소박하게 핀 연약한 꽃 무리. 이게 그 결과다. 영구동토에 열심히 뿌리내려 피어났지만 금방 사라지고 만다. 그렇게 열심히 피었는데도 봐주는 사람 또한 없다.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 노력. 그런 아름다움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툰드라맨은 생각했다. 바보 같아. 그것이 어쩐지 속상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지만 들어줄 사람조차 없는 말은 바람 속에 묻혔다. 툰드라맨은 자리를 옮겼다. 바람을 막아줄 나무조차 없는 허허한 바위산에 하얀 어둠이 드리웠다.

 

* * *

 

  "네가 관리하는 곳은 아름답네."

  밤이 가라앉았다. 극지의 바람과는 다른, 후텁지근한 여름밤의 공기가 나무와 풀냄새를 싣고 온다. 시야는 어둑했지만 하늘에 뜬 보름달이 이정표가 되어 길을 비췄다. 툰드라맨은 귓가에 들리는 풀벌레 소리를 음악 삼아 캠핑장 뒤편으로 난 길을 걸으며 자신의 옆을 지키는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바람도 적당히 선선하고, 이런저런 소리가 들려서 좋아. 무엇보다……"

  그렇게 말하며 툰드라맨은 잘 정돈된 길 옆 가에 핀 꽃을 바라보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다채로운 색의 꽃 무리가 활짝 피어있었다.

  

  "꽃이 이렇게나 잔뜩 피어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그런가."

 

  그럼. 그렇게 말하며 툰드라맨은 즐거운 듯 꽃 무리로 다가가 앉았다. 톡 하고 손끝으로 푸른색 꽃의 꽃망울을 건드리자 꽃이 작게 흔들거린다. 눈앞에 핀 화단에선 알싸한 꽃내음이 풍겨왔다.

  

  "나는 네가 일하는 곳도 멋지다고 생각한다."

  "딱히 북극이 싫다던가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아니,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농담이야, 농담."

  당황하며 해명하는 토치맨을 향해 툰드라맨은 짓궂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역시 이런 걸 보면 욕심이 나는 건 사실이야."

  "……."

  "여기 있는 꽃을 가져가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

  "그런 것보다 부탁하고 싶은 건 따로 있거든."

  "?"

  의아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툰드라맨은 웃었다. 들어준다고 약속하면 말하지 못할 것도 없는데. 일부러 애를 태우자 토치맨이 즉답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건 뭐든지 들어줄 테니까."

  "흐음, 지금 뭐든지라고 했지?"

  그 말에 다소 긴장한 듯 토치맨의 불꽃이 작게 일렁였다.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툰드라맨은 속으로 웃었다. 농담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그 서툰 모습이 못내 좋았다. 동시에 그 당황한 모습을 계속 보고 싶다는 짓궂은 마음도 든다. 툰드라맨은 장난기가 가득한 눈웃음을 짓고 토치맨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토치맨은 조금 움찔거렸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 작은 행동에서도 자신에 대한 신뢰가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툰드라맨이 다가왔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에 토치맨의 불꽃이 아까보다 더 크게 일렁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화상 입을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툰드라맨은 두 손을 토치맨 쪽으로 뻗었다. 그리곤 두 손 위에 얼음 결정을 만들어 건네며 입을 열었다.

  "―――공연에 와 주었으면 해."

  "공연?"

  "응, 조만간 오로라가 내리거든. 오로라가 내리는 시기는 워낙 변칙적이라 관측소에서 늦게 통보가 왔어."

  "그러고 보니 오로라라면……."

  "그래, 2년이나 기다려왔던 무대야."

  그 말에 토치맨은 툰드라맨이 건넨 얼음 결정을 스캔했다. 공연을 일주일 뒤, 툰드라맨의 스테이지에서 열리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데뷔 무대를 가지고 싶어. 토치맨은 언젠가 툰드라맨이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일주일 뒤, 그가 그토록 바라왔던 그 순간이 오는 듯했다.

  "블록이나 퓨즈네, 코사크 연구소 형제들과 록맨까지 포함해서 모두를 초대했으니까."

  "……."

  "중요한 공연이니까.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이렇게 만날 수도 없을 거고."

  "……."

  "그래서 말인데, 보러 와줄래?"

  "……."

  그러나 토치맨은 대답하지 못했다.

  툰드라맨은 답을 채근하는 대신 가만히 그의 상태를 살피며 기다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양어깨에서 타올랐던 불꽃이 잠잠해졌다. 그가 무언가 고민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정적이 흐르고 한참 뒤 열린 입에서 나온 답변은 다소 맥이 빠지는 답변이었다.

 

  "……공연을 본 적이 없어서. 아이스 댄스는 잘 알지 못한다."

  "뭐 어때. 이 기회에 보러오면 되지."

  "그렇지만……."

  토치맨이 눈을 돌렸다. 아, 이건 뭔가를 숨기는 표정이다. 토치맨은 이따금 거짓말을 할 때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변명을 해가면서까지 오지 못할 이유가 있나? 툰드라맨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나 툰드라맨은 그를 몰아붙이는 대신 말을 삼켰다. 내키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캐묻고 싶진 않았다. 아마 자신이 강요한다면 토치맨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 하더라도 공연을 보러 와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툰드라맨 측에서 사양이었다. 그렇게 구걸하는 듯한 공연을 보이기 원치 않았을뿐더러, 자신의 감정을 밀어붙이고 싶지 않았다.

 

  "사정이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부담은 가지지 말고 내키면 와줘. 그 자리, 지정석이니까."

  "……고민해보겠다."

  "그래."

 

  그것으로 대화를 마치고 툰드라맨은 마저 남은 산책을 즐기기로 했다. 이후 이어지는 시간은 조금 어색하고 무거운 공기가 맴돌았다.

 

* * *

 

  툰드라맨은 대기실에 앉아 통신기를 내려다보았다. 통신기는 아까 전부터 같은 화면을 띄우고 있었다. 10분 후면 시작될 공연, 그 공연에 대해 어제저녁에 온 짧은 격려의 메시지였다.

 

  그리고 토치맨으로부터 온 답변은 그게 다였다. 오겠다는 말도 가지 못한다는 말도 없었다. 툰드라맨 자신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 메시지를 받았을 때 그는 감정적으로 상당히 동요했다. 통신기의 알림 소리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보았더니 기운만 빠지고 말았다. 두뇌회로와 감정회로가 상충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과, 제대로 된 답조차 주지 못하는 그에 대한 실망이.

 

  "툰드라씨, 이제 슬슬 준비해주세요! 곧 시작합니다."

  "……응."

  하지만 공연은 공연이니까. 툰드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은 감정에 휘말릴 때가 아니었다.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연을 완벽하게 마치는 것. 오로라가 가장 영롱하게 빛날 때, 관객들에게 가장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무대를 선보이는 것이야말로 그가 그토록 바라왔던 순간이니까. 그 순간을 위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니던가. 준비해 놨던 의상을 걸치고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어둑어둑한 객석과 빙상 위. 어둠이 드리운 빙상 위에서 뒤돌아 자세를 잡았다. 공연장의 공기는 묵직했지만 불안하진 않았다. 혹독한 연습의 시간이었지만 자신감을 가져도 될 정도로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는 조용히 속으로 숫자를 셌다. 잠시간의 적막 후 음악이 흘렀다.

  툰드라맨의 머리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며 막이 올랐다.

  얼음을 짓치는 블레이드에서 튀어 오른 얼음 조각들이 오로라의 빛을 반사해 영롱하게 빛났다. 툰드라맨은 익숙한 스텝으로 흐르는 음악의 선율에 맞춰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그는 몇 번이고 연습해 몸에 익은 원무로, 은반 위를 누비며 무대를 꾸몄다. 오로라가 가장 낮게 깔린 구간에선 하늘로 떠올라, 한 바퀴, 두 바퀴. 무대와 하늘을 연결해주는 듯한 가벼운 몸짓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움직이게 만든다. 그렇게 뛰어오른 뒤 발이 땅에 닿을 때면 발치에선 하늘에서 보이는 것과 다른 아름다운 빛무리가 만들어진다. 완벽한 그의 독무대였다.

  그가 자아낸 다채로운 빛에 공연장에 있는 모든 시선이 집중되며 첫 곡이 끝났다. 재정비를 위해 막이 잠시 내려가기 전, 툰드라맨은 가볍게 인사를 올리며 관객석 쪽을 빠르게 훑었다. 공연 전에도 몇 번이고 확인하곤 했던, 무대가 가장 잘 보이는 위치.

  자리는 비어있었다.

 

* * *

 

  모든 관객의 기립박수를 끌어낸 무대가 끝난 뒤, 자신을 보러 와준 동료들과 행사의 스태프들마저 돌아가 아무도 남지 않은 공연장을 뒤로하며 툰드라맨은 대기실로 들어갔다. 대기실에 놓여있던 선물들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고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 무대만큼은 네가 봐주길 바랐는데.

  무대에 불만은 없었다. 공연 전에는 바닥에 팬 블레이드 자국이 복구되지 않아 빙판을 여러 번 갈 정도로 연습에 매진했으니까. 그리고 그 결과,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그려왔던 풍경 이상의 것을 관객들로부터 받았으니까.

  그렇지만 그것을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상대에게 보여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보러오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했으니 싫은 소리는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몇 번이고 올라왔지만 속상한 마음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아쉬움과 불만을 곱씹어 삼키고 있자니 실망이 원망이 될 것 같아 그는 머리를 털고 크게  심호흡했다. 아니야, 이제 다 끝났으니까. 이유를 물어본다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겠어. 그는 원망하는 대신 테이블로 손을 뻗어 자신 앞으로 온 선물들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공연 중의 장면을 홀로그램으로 만든 영상 장치, 오로라 빛 액체에 스테이지를 형상화한 모형이 담겨 있는 스노우볼, 얼음 속에 피어있는 번개 기둥, 툰드라맨의 형상을 본뜬 고무 인형. 여러 가지 선물과 공연에 대한 찬사가 담긴 카드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던 중 편지나 카드가 없는 부케가 눈에 들어왔다.

  푸른 장미가 한 아름 담긴, 무척이나 아름다운 꽃다발이었다.

  극지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생화 꽃다발이었다. 푸른 빛을 띠고 있는 장미는, 시선을 한순간에 빼앗을 만큼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손끝으로 꽃송이를 어루만지니 벨벳 같은 감촉이 느껴졌다. 

  누가 보낸 거지? 처음으로 떠오른 것은 칼린카 아가씨와 형제들이었다. 하지만 그들과는 공연이 끝난 뒤 직접 얼굴을 마주하며 선물을 넘겨받았더랬다. 다시 한번 꽃다발을 살펴보았지만 동봉된 카드나 메시지는 없었다. 의아해하며 부케를 이리저리 뒤져보던 그는,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고 꽃송이를 어루만지던 손을 멈추었다.

  푸른 장미의 꽃잎 뒷면은 조금 그을려 있었다.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생화. 그리고 소중히 포장되었음에도 끝이 저리 된 것은 원래 꽃 상태가 저랬던 것이 아니라――

  "……."

  툰드라맨은 말없이 꽃송이를 어루만졌다. 혹여 불타버린 꽃잎이 떨어질세라, 무엇보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손끝에서 느껴지는 여린 감각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건 아주 오래전, 그가 이 극지에서 느끼곤 했던 것과 비슷하면서 상반된 감각이었다. 극지에서 피는 꽃은 연약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이 부케에 담긴 꽃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꽃송이들. 피어나기까지 알아봐 주지 못했을 노력들.

  「그거 알아? 극지의 꽃들은 하나 같이 다 아름다워.」

  그리고 그는 그제야, 칼린카가 이야기했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가장 볼품없어도 좋다. 수많은 시선을 끌지 않아도 괜찮다. 그렇게 피어났음을 지켜봐 주는 단 한 가지 시선과 손길이 있다면.

  그는 조용히 그 부케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에는 영롱한 오로라가 내리고 있었다.

* * *

 

  다음날 새벽, 툰드라맨의 공연장을 정리하던 청소 로봇은 무언가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무대로 이어진 어느 통로의 한 켠이었다. 바닥의 상태가 이상했다. 바닥은 처음 보는 형태로 어그러져 있었는데, 그것은 무언가에 찍히거나 사람들의 발걸음에 쌓인 충격으로 금이 가거나 내려앉은 게 아닌 형태의 파손이었다.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거 같아 바닥을 훑으니 확실히 얼음의 질이 달랐다. 마치 한번 녹았다가 다시 언 것 같은 형태의 얼음이었다. 그 정도 열기가 바닥을 상하게 할 정도였으면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 청소로봇은 의문을 품고 다시 한번 주변을 살폈다.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곳을 지탱하는 단단한 얼음기둥의 한쪽이 녹아서 흘러내린 흔적이 보였다. 얼음 크리스털로 이루어진 투명한 유리창도 살짝 녹았다가 다시 얼어버린 듯, 안이 일그러져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주변을 살펴보던 중 로봇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의 유리창을 통해 안을 보면 무대의 한 가운데가 보인다. 평소에도 공연장을 자주 들르지 않는다면 알아볼 수 없는 특등석이다.

 

  "……?"

  청소로봇은 메모리를 더듬어 공연 관계자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설비를 망가트릴 정도로 강한 불꽃 능력을 가진 스탭은 없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정교하지 못한 사고회로로는 이 장소를 이렇게 만든 범인을 유추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청소로봇은 장소의 사진을 찍어 툰드라맨에게 전송했다. 이 알 수 없는 원인의 화재를, 그의 주인이라면 알고 있을 터였다.

Glitters_edited.jpg
계절.png

Torchman x Tundraman

[                  ]
 극지에서 피는 꽃은 
bottom of page